6월, 2026의 게시물 표시

PE-004 안개 너머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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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영남대학교 생명공학부 교수님들과 함께 흑산도를 찾았다 . 섬은 육지와 달랐다 .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착한 순간부터 세상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 . 하늘은 더 넓었고 , 바다는 더 깊었으며 , 바람은 더 솔직했다 . 섬 탐방을 마치고 저녁 무렵 전망대에 올랐다 . 멀리 섬들이 보이고 , 그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 처음에는 평범한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바다 위에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 안개는 천천히 섬들을 삼켰다 .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희미해졌고 , 수평선도 사라졌다 . 조금 전까지 보이던 풍경이 하나둘 안개 속으로 숨어 버렸다 .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 그때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 잠시 동안 안개가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저녁 햇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 사라진 줄 알았던 빛이었다 . 빛은 안개를 뚫고 나와 바다 위에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 그 장면은 몇 초에 불과했다 . 그러나 그 몇 초는 오래 기억될 만큼 강렬했다 . 나는 급히 셔터를 눌렀다 . 한 장 . 또 한 장 . 사진을 찍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 살아가다 보면 안개 같은 시간이 있다 .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으며 , 기다림만 길어지는 순간도 있다 . 그럴 때 우리는 빛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어쩌면 빛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안개 뒤에 가려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그날 흑산도의 바다는 내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 안개는 영원하지 않았고 , 빛도 포기하지 않았다 . 바람이 길을 열자 빛은 다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먼저 떠오르...

PE-003 물안개 위에 내린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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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어느 토요일 새벽 4시였다.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었고, 나만 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카메라를 챙겨 들고 운문댐으로 향했다. 산길은 어두웠다. 가끔 헤드라이트 불빛이 나무 사이를 스치고 지나갈 뿐, 주변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10월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집 안에 있을 때보다 가벼웠다. 아마도 그 무렵의 나는 자연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댐에 도착했을 때 물 위에는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개는 물결처럼 움직였고, 산과 호수의 경계는 사라져 있었다. 세상은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너머에서 햇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희미한 빛이었다. 그러나 곧 물안개 위로 금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햇살은 안개를 비추고 있었고, 안개는 빛을 품고 있었다. 마치 하늘과 땅이 함께 만들어 내는 한 편의 공연 같았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셔터를 눌렀다. 한 장. 또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기러기 아빠였다. 가족은 멀리 있었고, 집에 돌아가도 기다리는 목소리가 없었다. 외로움은 늘 마음 한편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연 속에서는 그 외로움이 조금 작아졌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물안개도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도 충분했다. 햇살이 안개를 품어 주듯, 자연은 말없이 사람의 마음을 품어 주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도 이 사진을 바라보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진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 새벽의 공기, 차가운 바람, 가슴 깊이 스며들던 고요함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외로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안고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나는...

PE-002 벚꽃길을 걷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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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영남대학교 캠퍼스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듯 고요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벚꽃길로 향했다. 인기척이 사라진 길 위에는  밤사이 피어난 꽃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고, 길 양쪽으로 늘어선  벚나무들은 하얀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공기 속에서  꽃잎은 스스로의 빛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길을 '러브로드'라 부른다. 봄이 오면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걷고,  친구들이 웃으며 사진을 남기는 곳. 젊음이 가장 환한 얼굴로 지나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날 아침, 그 길은 누구의 것도 아닌 채 비어 있었고, 그 비어 있음이  오히려 더 충만하게 느껴졌다. 그때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길 한가운데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한 주민. 누구와 함께도 아니었고,  무엇에 쫓기지도 않는 걸음이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고,  시선은 어디에도 붙들려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속도로, 길 위에 발걸음을  하나씩 놓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셔터를 누르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벚꽃은 화려했지만 그 사람은 화려하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한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평범함이 꽃보다 먼저 마음에 들어왔다.  아마도 그 걸음이 어떤 목적도 증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늘 목적지를 생각하며 걸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 남들보다 얼마나 앞서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곤 했다. 길은 언제나 통과해야 할 구간이었고,  시간은 쫓아가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걷는 동안에도 마음은 늘 도착 이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길의 의미는 조금씩 달라졌다.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걷는 시간이 생겼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 아무에게도 ...

PE-001 | 안개 속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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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속의 사람] 방학이 되면 나는 미국으로 간다.  몇 달을 기다려 마침내 가족의 품에 안기지만,  그 시간은 언제나 아침 안개가 걷히듯 소리 없이 지나간다.    자녀들의 웃음소리, 식탁에 둘러앉아 나누던 도란도란한 이야기들,  함께 걸었던 공원의 오솔길—— 그 모든 것이 어제까지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한 현실이었는데,  오늘 아침이 되자 어느새 기억이라는 이름의 서랍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 있었다. 시차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국의 새벽은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텍사스의 시간으로는 한낮이 지나 오후의 햇살이 기울어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조용히 집을 나와 강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개가 짙었다. 강도, 나무도, 길도——멀리 있는 것들은 모두 그 하얀 장막 뒤로 물러나 있었다.  세상은 마치 연필로 조심스럽게 그린 그림 위에 누군가 흰 물감을 넓게 덧칠해 놓은 것처럼 희미하고 몽롱했다.  소리마저 안개에 흡수되는 듯, 사방이 고요했다. 그때였다. 강변 쉼터 아래, 한 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안갯속에 그분은 고요히 앉아 계셨다.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무엇을 기다리는지, 혹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처음 보는 이의 뒷모습이었건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가슴 한켠을 조용히 건드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그 노인의 뒷모습이었지만, 어쩌면 그 안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끊임없는 반복이라고들 말한다.  젊은 날에는 그 말이 관념적인 문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는 횟수가 쌓여갈수록 비로소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