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N-001 자유의 온도

 


아침에 성경을 읽다가 문득 창가에 

놓인 유리컵을 바라보았다. 
 
컵 속의 물은 말없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빛은 투명한 것에 닿을 때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이면 얼음이 되고, 
여름이면 김을 품은 수증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던 물이, 
 
그날은 가장 평온한 얼굴로 
내 앞에 머물러 있었다.

오래전 읽은 물리학 책의 
한 단어가 천천히 떠올랐다. 
 
상전이 (Phase Transition).
얼음은 단단하다. 
 
낮은 온도 속에서 물 분자들은 
서로를 붙잡은 채 쉽게 
제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열이 스며들면 
그 질서는 조금씩 풀린다. 
 

고요히, 
그러나 분명하게. 
 
물이 되고, 
마침내 수증기가 되어 
더 이상 하나의 형태 안에 
머물지 않는다. 
 
같은 물이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그 컵을 바라보며 
성경 구절 하나를 마음속에 
붙들고 있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자유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사람들은 흔히 먼저 
바깥을 떠올린다. 
 
막힘없이 가는 길, 
간섭받지 않는 선택,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태. 
 

그러나 어떤 자유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풀려난다. 
 
오래 굳어 있던 마음이 
제 단단함을 놓는 순간, 
 
익숙한 방식으로만 살던 존재가 
조금 다른 결을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 
 
비로소 사람은 자기 안에서 낯선 
문 하나가 열리는 소리를 듣는다.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해야 하니까 일했고, 
해야 하니까 책임을 감당했고, 
해야 하니까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의무는 삶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마음마저 
단단하게 만들었다. 
 
오래 얼어 있던 물처럼, 
나는 제 모양을 지키는 데 
익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있다. 
 
사람은 책임만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 
 
삶을 끝까지 데워 주는 것은 
의무의 힘이 아니라 
기쁨의 힘이라는 것.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일을 할 때, 
피곤은 줄지 않아도 이상하게 
마음의 결이 달라졌다. 
 
식당 문을 나서며 건넨 짧은 
한마디에 젊은 종업원의 표정이 
잠깐 환해지던 순간,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던 
사람 쪽으로 시선을 
한 번 더 머물리던 저녁, 
 
오래 연락하지 못한 친구의 이름을 
눌러 놓고 신호음 너머의 침묵을 
함께 듣던 시간. 
 

그런 날에는 하루 전체의 
무게가 같아도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빛이 남았다. 
 
해야 했기 때문에 한 일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한 일들. 
 
그 작고 사소한 움직임이 
이상할 만큼 
나를 먼저 따뜻하게 했다.

어쩌면 자유는 그런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억지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 일. 
 
순종이 이를 악물고 견디는 
자세가 아니라 
어느새 몸에 밴 숨결처럼 
자연스러워지는 일.
 

물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얼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부의 온기가 닿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도 어쩌면 
그와 비슷할 것이다. 
 
혼자 애써 마음을 고치려 할 때는 
잘 바뀌지 않던 것들이, 
어떤 따뜻함 앞에서는 
조금씩 경계를 푼다. 
 
오래 닫혀 있던 생각이 누그러지고, 
날카롭게 굳어 있던 
판단이 물러지고, 
 
타인을 향해 있던 
마음의 문턱도 전보다 낮아진다.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람을 바꾼다는 사실은 
늘 신기하고도 참된 일이다.
 
저녁이 되어 창밖을 보니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잎사귀들은 그 지나감을 
알고 있었다. 
 
흔들리는 방향과 떨림의 결로, 
자기 곁을 스쳐 간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성령(Holy Spirit)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람 안을 지나가며, 
 
얼어 있던 것을 녹이고, 
굳어 있던 것을 풀고,
 
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던 사람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천천히 바꾸어 가는 힘. 
 
자유는 멀리 있는 깃발처럼 
펄럭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조용히 스며들어 
마음의 온도를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하루를 마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내가 한 일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의무였고, 
얼마나 많은 것이 기쁨이었는지를. 
 
그 물음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내 안에 아직 얼어 있는 자리와, 
조금씩 풀리고 있는 자리를 
가만히 비추어 줄 뿐이다.

창가의 유리컵은 여전히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 침묵이 오래 남는 날이 있다.

자유란 어쩌면 멀리 가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이 서서히 
따뜻해지는 속도 속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첫 발을 떼는 일에 대하여 (from faith to faith)

판단과 구원 사이에서

르호봇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