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008 아침은 언제 시작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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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의 아침은 서두르지 않는다. 해는 떠오르지만 곧장 세상을 환하게 열어 보이지 않는다. 안개는 쉬이 물러서지 않고, 빛 또한 제 모습을 앞세우지 않는다. 모든 것은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간다. 영천댐을 따라 걷던 그날, 나는 풍경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한동안 잊고 지내던 마음의 속도를 만나러 갔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살아가며 끊임없이 시작을 말한다. 새로운 계획, 새로운 일, 새로운 계절. 대개 시작이란 더 빨라지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자연은 다른 방식으로 가르친다. 참된 시작은 앞서 달려가는 데 있지 않고 조용히 밝아지는 데 있다고. 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없이 계절을 건너며 셀 수 없이 많은 아침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햇살이 물 위로 내려앉고 겨울이 와서 머물다 가고 끝내 다시 봄이 돌아오는 일을, 그저 오래, 묵묵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곳에는 시간을 이기려는 흔적이 없었다. 대신 시간과 다투지 않고 함께 살아온 것들만이 지닐 수 있는 고요한 평안이 남아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특별한 순간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해질 때 이미 곁에 와 있던 것을 비로소 알아보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그날 영천댐에서 떠오른 것은 아침해만이 아니었다. 조금은 바쁘게, 조금은 앞질러 살아가던 내 마음에도 늦가을의 햇살 하나가 말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HSN-001 자유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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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성경을 읽다가 문득 창가에  놓인 유리컵을 바라보았다.    컵 속의 물은 말없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빛은 투명한 것에 닿을 때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이면 얼음이 되고,  여름이면 김을 품은 수증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던 물이,    그날은 가장 평온한 얼굴로  내 앞에 머물러 있었다. 오래전 읽은 물리학 책의  한 단어가 천천히 떠올랐다.    상전이 (Phase Transition). 얼음은 단단하다.    낮은 온도 속에서 물 분자들은  서로를 붙잡은 채 쉽게  제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열이 스며들면  그 질서는 조금씩 풀린다.    고요히,  그러나 분명하게.    물이 되고,  마침내 수증기가 되어  더 이상 하나의 형태 안에  머물지 않는다.    같은 물이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그 컵을 바라보며  성경 구절 하나를 마음속에  붙들고 있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자유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사람들은 흔히 먼저  바깥을 떠올린다.    막힘없이 가는 길,  간섭받지 않는 선택,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태.    그러나 어떤 자유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풀려난다.    오래 굳어 있던 마음이  제 단단함을 놓는 순간,    익숙한 방식으로만 살던 존재가  조금 다...

PE-007 금빛 바다를 이고 가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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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봄날, 감포의 새벽은 고요했다. 밤과 아침이 아직 완전히 갈라지지 않은 시간, 동해 바다 위로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수평선 가까이에서 시작된 빛은 잔잔한 물결을 따라 번져 나갔고, 바다는 조금씩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해안가를 걷고 있었다. 새벽 바다를 찍기 위해서였다. 빛이 바다에 닿는 순간은 늘 짧고, 그래서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물결 위에 얇게 놓인 빛, 바람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는 수면,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새벽의 바다는 말이 없는데도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시선은 바다에서 한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 머리에 물통을 인 한 여인이 해안 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역광 속에 잠긴 뒷모습이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바다 쪽에서 밀려온 빛이 여인의 어깨선과 물통의 가장자리를 희미하게 감싸고 있었다. 걸음은 느렸고, 흔들림은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몸에 밴 균형이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금빛으로 번지는 바다와 그 앞을 지나가는 한 사람. 어린 시절에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새벽이면 누군가는 우물가로 향했고, 누군가는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돌아오곤 했다. 그때는 그런 모습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들이 문득 돌아와, 한 시대의 표정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날 내가 본 것도 그런 풍경이었다. 눈부신 일출이 있었고, 바다 위에는 찬란한 빛이 흘렀다. 사진 속에 남은 것은 풍경의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그 빛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한 사람의 시간이 함께 남았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빛은 그 앞에 길처럼 놓였고, 바람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 여인은 물을 나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한 시대의 시간을 이고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위해 하루를 시작하고, 제 몫의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며, 오랜 세월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걸어가는 사람. 바다보...

새벽의 고양이와 보이지 않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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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벽, 우연처럼 찾아온 장면 오늘 새벽, 운동을 나가기 위해 아파트 문을 열던 순간이었다.  모퉁이 그늘 속에 어미 고양이 한 마리와 두 마리의 새끼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특별한 장면은 아니었다.  도시의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새끼들은 건강해 보였고, 어미의 눈빛에도 굶주림의 짙은 그늘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고양이 먹이용 닭고기 봉지를 꺼내 들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듯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들은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 자리에 다시 그들이 있었다.  새끼들은 나무 사이를 오가며 바쁘게 놀고 있었고,  어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닭고기 세 조각을 조용히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어미는 내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따라보고 있었다. 한참 뒤 다시 그 자리를 지나게 되었을 때,  새끼들은 먹이에 열중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새끼들보다 어미에게 오래 머물렀다.  어미는 먹이 곁에 있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몸을 낮춘 채,  귀는 사방의 소리를 모으고 눈은 먼 곳의 기척까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새끼들이 먹는 동안 어미는 먹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어떤 문장을 보았다.  소리로 말해지지 않았으나 분명히 읽히는 문장.  생명이 다른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오래전부터 써 내려온,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였다.   2. 침묵은 언제나 표면보다 깊다 문학은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알아보았다.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