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흘러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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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공기와 시간   이문호는 아침마다 같은 의자에 앉는다. 베란다 유리문 앞, 낡은 등나무 의자.  바람이 불면 가끔 삐걱거리지만  그는 그 소리마저 오래된 친구처럼 여긴다.    방 안의 공기는 아직 밤의 냄새를 품고 있고,  베란다 너머로는 아파트 옥상들 사이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해를 직접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해가 지붕 위로 오를수록 방 안의 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지의 꽃무늬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탁자 위 찻잔에 반사된 빛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그는 묵묵히 바라본다. 올해 일흔둘이다. 이문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일흔둘이 되었다는  사실이 때로는 낯설다. 거울 앞에 서면 낯선 얼굴이 자신을 바라본다.   흰머리. 가늘어진 목. 손등의 검버섯. 그것들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구석에서는 여전히 사십대의 감각으로  세상을 만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삼십 년을 대학에서 가르쳤다. 사학과 교수.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자신의 시간을  이렇게 허술하게 다뤄왔다는 것이  돌이켜보면 우습기도 하다. 그는 찻잔을 든다. 보리차가 식어 있다. 마셔도 되고 마시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 자신에게 허락된 가장 분명한 사실이었다.   전화가 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학교 후배 박재연으로부터였다. 오래된 동료들을 이어주는 일종의 연락망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전화는 대부분 부고였다. 이문호는 전화를 받으면서 이미 짐작했다. 선생님. 최병덕 교수님 아세요? 사학과 아니고 경제학과 분이신데. 아, 최 교수.  이문호는 잠시 그 이름을 더듬었다. 함께 교수 식당에서 밥을 먹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