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다.


https://youtu.be/9QeNRMJFnOY





제1장 — 에섹: 다툼의 우물

그해 봄, 노인은 마당 한 귀퉁이에 앉아 
오래된 두레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레박은 쓸 일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수도관이 들어선 뒤로 아무도 우물가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이따금 그곳에 와서 
앉았다. 

돌담 위에 이끼가 끼고, 두레박줄이 
삭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삶이 저 우물 속에 잠겨 
있다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이준형. 나이 일흔셋. 
경기도 양평 산자락에 홀로 사는 
전직 교사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삼십여 년이 
지나고, 

정년이 지나고, 아내가 먼저 가고. 
남은 것은 낡은 집 한 채와 마당의 우물, 
그리고 누구도 더 이상 묻지 않는 
이름 석 자뿐이었다.


봄바람이 대청마루 끝을 쓸고 
지나갔다. 

노인은 두레박 끝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썩은 나무가 부스러졌다.

"그래도 파야지."

혼잣말이었다. 아무도 듣지 않았지만, 
그 말은 마당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날 저녁, 서울에서 아들이 전화를 
했다. 

짧은 안부였다. 
요양원을 알아봤다는 말이 뒤에 
붙었다. 

 
노인은 전화를 끊고 우물가에 
다시 앉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별이 하나씩 돋았다.

"에섹."
그는 그 낱말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읽었던 성경 구절 한 줄. 
다툼이라는 뜻. 

빼앗겼지만, 

그래도 다시 팠다는 
이삭의 첫 번째 우물.


그는 자신의 우물이 무엇으로 
막혔는지 그날 밤 처음으로 생각했다.


제2장 — 시트나: 대적의 흙더미

며칠 뒤 마을 경로당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사회복지사가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노인은 편지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는 사람이 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아내가 떠난 뒤로 그랬다. 
인사가 오고 위로가 오고,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아내를 
그렇게 데려가셨는가. 

그것이 그의 우물을 막은 
첫 번째 흙이었다.


수요일 오후, 
사회복지사 박지현이 왔다. 
삼십 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녀는 마당을 보며 잠깐 멈칫했다.

"우물이 있네요."

"옛날 거요. 쓸 수 없어요."

"물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막힌 건가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치 있게 화제를 돌렸다.

그날 이후 박지현은 매주 왔다. 
오는 것이 일이었지만, 
그녀는 가끔 일과 무관한 것들을 
가져왔다. 

 
봄나물 한 봉지, 
경로당 어르신들의 안부, 
마을 뒤 개울에 물이 많이 불었다는 
소식. 

어느 날은 작은 성경책을 가져왔다.

"드리려고 가져온 건 아니에요. 
그냥 같이 읽을까 해서요."

노인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간 뒤, 
그는 자신의 낡은 성경을 책장에서 
꺼냈다. 

먼지를 털고 창세기를 펼쳤다.

시트나. 대적.
 
그것이 이삭의 두 번째 
우물 이름이었다. 

빼앗기고 또 빼앗겼지만, 
이삭은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았다.

노인은 페이지를 넘기다 멈췄다. 
창세기 26장 22절. 
그는 천천히 읽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제3장 — 캔자스의 열두 사람

그해 여름, 노인의 집에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육십 대 중반의 남자였다. 

박지현이 소개했다.

"이쪽은 오기현 목사님이에요. 
미국에서 오래 계시다 최근에 
귀국하셨어요."


목사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노인처럼 말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마당에 앉아 오래 침묵했다.

이윽고 목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물이 있군요."
 
"막혔어요."

"파내면 되지요."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목사의 눈이 우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캔자스 이야기를 했다. 
열두 명으로 시작한 교회.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라는 말들. 
 
새벽에 단 한 사람이 앉아 있을 때, 
그를 천 명처럼 대했던 밤들. 
 
아내가 짐을 쌌던 날, 
자신도 짐을 쌌던 날. 
그러나 둘 다 동시에 싼 적은 없었다.

노인은 말없이 들었다.

"사십 년 동안 술을 마신 사람이 
있었어요. 

성가대에 갔는데, 
찬송 가사에서 말씀을 만난 거예요.
 
누구도 그 우물을 막을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 이미 파고 계셨으니까."

노인의 눈이 젖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우물을 바라봤다. 
이끼가 낀 돌담 너머로 오래된 
하늘이 보였다.


"나도 막힌 우물이 있소."

"알아요."

목사가 말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4장 — 흙더미를 파내는 손

노인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의 이름을 오랜만에 소리 내어 
불렀다.

 
혜선. 
두 글자가 방 안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무엇이 막혀 있었는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하나님은 선하지 않다는 생각. 
혜선이 너무 빨리 간 것이 하나님 
탓이라는 마음. 

 
요양원 이야기를 꺼낸 아들을 
미워한 마음. 

아무도 필요 없다고 결론 내려버린 
마음. 

 
두레박을 거두어버린 것. 
그것들이 우물 위에 쌓인 흙이었다.

이삭은 빼앗길 때마다 다시 팠다. 
원망하지 않았다고 성경이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파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노인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 
마당으로 나갔다. 

창고에서 삽을 꺼냈다. 
우물 주변에 쌓인 낙엽과 흙을 
조금씩 걷어냈다. 

 
늙은 손이 떨렸다. 
삽자루가 무거웠다. 
그래도 팠다.

해가 뜰 무렵, 
박지현이 지나가다 보았다. 
그녀는 차를 세웠다.

"선생님, 뭐 하세요?"

"우물 파요."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코트 소매를 걷었다.

"저도 도울게요."
둘이 한참을 팠다. 
말이 없었다. 

아침 햇살이 우물 돌담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의 숨이 하얀 연기가 되어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제5장 — 르호봇: 넓어진 하늘

가을이 왔다.
우물은 다 청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더 이상 우물 앞에서 
두레박을 거두어버리지 않았다.

오기현 목사는 매달 한 번 왔다. 
그들은 마당에 앉아 성경을 읽었다. 
때로는 읽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들이 왔다. 추석이었다. 
아들은 요양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어릴 때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셨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우물 청소했어요?"

"조금."

"도와드릴게요."

그들은 오후 내내 함께 팠다. 
말이 없었지만 다툼도 없었다. 
해가 기울 때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여기 좋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어딘가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 붙일 수 
없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는 일기를 썼다.

르호봇. 하나님께서 넓게 하셨다. 
 
우물이 아직 다 뚫리지 않았어도, 
이미 하늘이 넓어졌다. 
아들과 함께 앉았던 저녁이 
르호봇이었다. 

 
말없이 삽질하던 봄날 아침이 
르호봇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고요가, 
르호봇이다.



제6장 — 두레박을 다시 내리며

겨울이 오기 전, 
우물에서 다시 물이 났다.
노인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먼저 알리지 않았다. 

혼자 두레박을 내렸다. 
줄이 팽팽해지는 느낌. 
올라오는 무게감. 
물이 찰랑거렸다. 
맑았다.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냥 바라봤다.

오래전 혜선이 이 우물에서 물을 
떠서 국화차를 끓여줬다. 

가을 오후였다. 
노란 찻잔, 국화 향기, 

그리고 그녀의 웃음. 

그 장면이 물 위에 떠올랐다가 
잔물결이 되어 사라졌다.


"고마워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그는 몰랐다. 

아내에게, 
하나님에게, 
아들에게, 
목사에게, 
박지현에게. 
아니면 그 모두에게. 

그 모두를 통해 자신에게 오신 분에게.

봄에 박지현이 가져온 성경책이 
마루에 놓여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창세기 26장을 다시 펼쳤다. 
22절을 읽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여백에 
작은 글씨로 썼다.


"이것이 나의 르호봇이다. 
2024년 겨울, 양평 산자락에서."

우물 위로 눈이 내렸다.
노인은 마당에 서서 그것을 바라봤다. 
두레박은 우물 옆에 놓여 있었다. 
 
새것으로 바꾼 것이었다. 
줄도 새것이었다. 
아들이 사 온 것이었다.

그는 내일도 두레박을 내릴 것이었다. 
모레도. 
그다음 날도.


막힌 곳에서 떠나지 않고, 
다시 파는 것. 
 
말씀 한 줄을 붙들고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것. 

그 작고 우직한 행위 위에 
르호봇의 은혜가 

내려앉는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았다.

르호봇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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