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고양이와 보이지 않는 이야기

 





1. 새벽, 우연처럼 찾아온 장면


오늘 새벽, 운동을 나가기 위해 아파트 문을 열던 순간이었다. 

모퉁이 그늘 속에 어미 고양이 한 마리와 두 마리의 새끼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특별한 장면은 아니었다. 


도시의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새끼들은 건강해 보였고, 어미의 눈빛에도 굶주림의 짙은 그늘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고양이 먹이용 닭고기 봉지를 꺼내 들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듯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들은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 자리에 다시 그들이 있었다. 

새끼들은 나무 사이를 오가며 바쁘게 놀고 있었고, 

어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닭고기 세 조각을 조용히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어미는 내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따라보고 있었다.


한참 뒤 다시 그 자리를 지나게 되었을 때, 

새끼들은 먹이에 열중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새끼들보다 어미에게 오래 머물렀다. 

어미는 먹이 곁에 있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몸을 낮춘 채, 

귀는 사방의 소리를 모으고 눈은 먼 곳의 기척까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새끼들이 먹는 동안 어미는 먹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어떤 문장을 보았다. 

소리로 말해지지 않았으나 분명히 읽히는 문장. 

생명이 다른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오래전부터 써 내려온,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였다.


 



2. 침묵은 언제나 표면보다 깊다


문학은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알아보았다.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진실을 품는다는 사실을, 

좋은 문장들은 늘 먼저 감지해 왔다. 


헤밍웨이의 이른바 '빙산 이론'은 바로 그런 통찰의 문학적 형식이었다. 

드러난 것은 작고, 감춰진 것이 더 크다. 

독자는 몇 줄을 읽지만, 실은 그 아래 잠긴 무게를 읽는다.


그날 새벽의 어미 고양이도 그랬다. 

그 행동에는 어떤 표정도, 어떤 고백도, 어떤 수사도 없었다. 


그러나 먹이 곁을 비켜선 그 짧은 거리, 

새끼들이 먹는 동안 자신은 경계의 자리에 머무는 그 조용한 선택은 

많은 말보다 더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랑은 때로 손을 내미는 행위보다 

한 발 물러서는 행위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음으로써 타자의 안전을 먼저 완성하는 방식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서 인간은 종종 고통과 연민의 심연을 통해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카뮈에게 세계는 부조리하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도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 순간은 

이상할 만큼 빛난다. 


한국 문학 역시 오래전부터 어머니를 전면의 영웅이 아니라 

배후의 체온으로 그려 왔다. 


말하지 않지만 끝내 버티는 존재,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떠받치는 존재로.


그러므로 그날 내가 본 것은 단순한 동물적 습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생명이 다른 생명의 배후가 되어 주는 오래된 형식이었다. 


문학은 오래전부터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 왔고, 

나는 그 새벽에 그 말의 뜻을 다시 배웠다.


 



3. 과학은 그 사랑의 구조를 해명하려 한다


문학이 의미를 읽어 준다면, 

과학은 그 의미가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묻는다. 


진화생물학은 어미의 행동을 

윌리엄 해밀턴의 포괄적 적합도 이론으로 설명한다. 


개체는 자기 보존만이 아니라 자기와 유전적으로 이어진 

존재의 생존을 통해서도 진화적 성공을 이룬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즉각적 이익을 뒤로 미루는 행동은 감상적 예외가 아니라 

생명의 깊은 문법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의 자기 복제를 말했을 때조차, 

역설적으로 그 자기성은 종종 돌봄과 희생의 얼굴로 나타난다.


차가운 계산처럼 보이는 자연선택은 때때로 

따뜻한 보호의 몸짓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콘라트 로렌츠와 니코 틴베르헌 이후의 동물행동학은 

본능을 단순한 반사로 보지 않았다. 


특정한 환경 자극에 대한 정교한 반응 체계, 

위험과 보호 사이의 선택, 

거리 조절과 경계 행동은 생존을 위한 고도의 패턴이다. 


어미 고양이가 먹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주변을 살피는 일은 무심한 자세가 아니라, 

행동생태학적으로는 경계의 분업에 가깝다. 


새끼는 섭식에 집중하고, 어미는 위험 감시에 집중한다. 

생명은 이렇게 역할을 나누어 연약함을 보호한다.


신경과학은 여기에 더 미세한 층위를 더한다. 


위협의 가능성을 감지하는 편도체, 자율신경계를 조율하는 시상하부, 

돌봄 행동과 유대 형성에 깊이 관여하는 옥시토신과 도파민 회로는 

사랑이 결코 추상적 관념만이 아님을 보여 준다. 


포유류의 모성 행동은 

감정과 생존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생물학적 장치다. 


자크 팽크세프가 말한 정서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자면, 

돌봄은 후천적 도덕 이전의 원초적 정동이다. 


사랑은 나중에 철학이 이름 붙인 것이지, 

생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은 사랑을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단지 시적 과장이 아니라 

생명의 가장 깊은 층위까지 스며 있는 질서임을 드러낸다. 


분자는 현상을 설명하지만, 

의미를 소진하지는 못한다. 


옥시토신이라는 이름을 안다고 해서 

어미의 경계가 덜 숭고해지는 것은 아니다. 


설명은 경이를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이가 얼마나 정교한 구조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 준다.


복잡계 과학의 시선으로 보면, 

그 새벽의 장면은 또 다른 깊이를 얻는다. 


일리야 프리고진이 말했듯 세계는 평형의 정적 질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흐름과 상호작용 속에서 질서를 산출하는 열린 체계다.


에드워드 로렌츠의 '나비 효과'가 일깨우듯, 

미세한 초기 조건의 차이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내가 잠시 집으로 돌아가 닭고기를 가져온 일, 

어미가 경계의 자리를 택한 일, 

새끼들이 그 몇 조각의 먹이로 아침을 시작한 일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들은 비선형적으로 얽힌 작은 상호작용들이다. 

세계는 거대한 필연만으로 움직이지 않고, 

수많은 미세한 응답들의 축적으로 진행된다.


여기에 제이컵 폰 윅스퀼의 움벨트(Umwelt) 개념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각 생명은 자기 종 특유의 감각 세계 속에서 세계를 경험한다. 


새끼 고양이의 세계에는 먹이의 냄새와 질감이 중심이었을 것이고, 

어미의 세계에는 위험의 방향과 거리, 

소리의 진폭과 낯선 존재의 움직임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같은 공간이라도 서로 다른 세계가 포개져 있었다. 


나는 인간의 사유로 그 장면을 보았지만, 

어미는 경계의 감각으로, 

새끼는 배고픔의 리듬으로 그 세계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멀리 보면, 

그 닭고기 한 조각조차 우주적 연쇄 속에 놓여 있다. 


에르빈 슈뢰딩거가 생명을 '질서를 먹는 존재'로 보았듯, 

생명은 외부로부터 에너지와 질서를 끌어들여 자기 구조를 잠시 유지한다. 


태양에서 온 에너지가 식물로, 동물로, 냉장고 속 음식으로, 

다시 새끼들의 몸속으로 흘러간다.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와 질소, 산소와 철은 

한때 별 내부의 핵융합에서 태어난 원소들이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우리는 문자 그대로 

별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새벽의 그 작은 먹이 장면은 단순한 동네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가 

한 생명의 입에서 다른 생명의 생존으로 건너가는 장면이다.


문학이 감동으로 포착한 것을 과학은 구조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진실을 

서로 다른 해상도로 읽어 낼 뿐이다.


 



4. 철학은 '보았다'는 말의 무게를 다시 묻는다


여기서 철학이 조용히 끼어든다. 

우리는 무엇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가. 


플라톤은 인간이 종종 그림자를 실재로 착각한다고 보았고, 

칸트는 우리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인식의 범주와 형식을 거쳐 구성된 현상만을 안다고 말했다. 


새끼들은 닭고기를 보았고, 나는 어미를 보았다. 

그러나 어미가 보고 있던 것은 어쩌면 우리 둘 다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위험, 가능성으로서의 위협, 

실현되기 이전의 불안 말이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을 단순한 시각 정보의 입력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의 세계-얽힘으로 보았다. 


본다는 것은 거리를 둔 채 대상을 측정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세계 속에 잠겨 있는 몸이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오늘 어미 고양이는 세계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읽고 있었다. 


귀의 각도, 동공의 긴장, 근육의 미세한 대비는 

모두 하나의 인식이었다. 


인간이 개념으로 해석하기 전에 

생명은 먼저 몸으로 세계를 안다.


하이데거의 말로 옮기면, 

존재는 언제나 세계-내-존재이며, 

그 핵심 구조 중 하나가 배려(Sorge) 다. 


존재한다는 것은 홀로 고립되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돌보고 염려하며 세계와 맺어지는 것이다. 


어미의 자리 이동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이전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타자의 얼굴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얼굴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타자의 취약성이다. 


새끼들의 연약함은 

어미로 하여금 자기 욕구를 뒤로 물리게 한다. 


그 후퇴는 손실이 아니라 책임의 탄생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윤리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가장 오래된 윤리의 형태일 수 있다.


한편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자기 보존의 노력, 곧 코나투스(conatus) 를 지닌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고등한 생명일수록 이 자기 보존이 

고립된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속 자기 보존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부모가 자식을 지키는 일은 

자기와 타자가 분리된 두 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생명은 순수한 개인주의로 유지되지 않는다. 

존재는 이미 관계적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빌리면 

세계는 고정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들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새벽의 그 장면은 '어미 고양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경계함, 먹임, 바라봄, 물러섬, 허기를 참음, 

위험을 예감함 같은 사건들의 직조였다. 


실재는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존재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나는 내 삶 또한 그렇게 읽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오직 내 의지와 판단으로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돌아보면 내 삶은 수많은 배려와 보호와 유예와 

우연들의 교차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내가 스스로 길을 걸었다고 믿은 자리마다,

사실은 누군가 먼저 위험을 감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유와 의존, 의지와 환경, 

선택과 부여 사이의 긴장은 늙을수록 더 선명해진다.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자족적인 존재는 아니다.


 



5. 신학은 그 연결과 배려를 섭리의 시야로 읽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은 과학과 철학이 열어 놓은 문을

더 넓은 차원으로 밀어 올린다. 


이 세계의 돌봄과 연결과 배려는 단지 생존의 기술인가, 

아니면 존재의 더 깊은 뜻을 가리키는 표지인가.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이미지로도 말한다. 


이사야는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하나님이 위로하신다고 말하고, 

시편은 하나님을 날개 아래 품어 주는 존재로 노래한다. 


보호와 돌봄은 성경에서 주변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가까운 비유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 피조 세계의 질서는 

창조주의 지혜를 반영하는 흔적일 수 있다. 


칼뱅이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라 불렀을 때도, 

그는 자연을 단지 배경이 아니라 계시의 흔적이 스며 있는 장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그날 새벽 어미 고양이의 행동은 

단지 본능의 표출로만 끝나지 않는다. 


신학의 언어로 보자면, 

그것은 창조 안에 새겨진 사랑의 문법이 잠깐 드러난 장면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질서 있는 사랑(ordo amoris) 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은 무질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존재를 제자리에 놓는 힘이다. 


더 약한 것을 먼저 살리고, 

더 취약한 것을 먼저 감싸는 방향으로 

자신을 배열하는 힘 말이다. 


어미의 경계는 바로 그런 질서의 작은 표지였다.


섭리라는 말도 여기서 다시 들린다. 

섭리는 하나님이 세계를 기계처럼 조종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조각만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전체를 보고 계신다는 고백에 가깝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예정조화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종종 부분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연결을 뒤늦게 깨닫는다. 


새끼는 먹이를 보고, 나는 어미를 보았지만, 

하나님은 굶주림과 경계와 연민과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을 

한 장면으로 품고 계실지 모른다. 


인간의 시야가 단면이라면, 

섭리는 총체에 가까운 시야다.


신앙은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무턱대고 믿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뜻을 읽어 내는 훈련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질서가 있다면, 

신앙은 그 질서를 맹목이 아니라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흔들리는 나뭇잎은 보인다. 

중력은 보이지 않지만 낙하는 보인다.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어미가 먹지 않은 채 경계를 서는 자세는 보인다. 

섭리도 아마 그런 방식으로 흔적을 남길 것이다.


과학의 진정한 덕목이 겸손이라면, 

신앙의 진정한 자세 역시 겸손일 것이다. 


현미경이 없던 시대에도 세균은 있었고, 

망원경이 없던 시대에도 은하는 존재했다. 


인간의 인식은 늘 부분적이었고, 

세계는 늘 그보다 넓었다. 


그러므로 늙어 간다는 것은 확신을 무한히 늘리는 일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경외를 깊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6.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


우리는 대개 눈앞의 닭고기만 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닭고기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부모의 기도가 있다. 

자녀가 잠든 뒤에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마음, 

자녀가 배부를 때 비로소 자기 허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그 총량은 자녀가 다 알지 못한다. 

가장 완전한 보호는 보호받는 이가 

그것을 보호로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친구의 배려도 있다. 

어떤 말, 어떤 침묵, 어떤 후퇴가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사랑이었다는 사실로 번역되곤 한다. 

사랑의 언어는 자주 늦게 해독된다.


수많은 낯선 이들의 수고도 있다. 

오늘 내가 걷는 길, 마시는 물, 읽는 책, 누리는 질서는 

모두 이름 모를 사람들의 노동과 정성 위에 서 있다. 


브뤼노 라투르가 말했듯 세계는 홀로 존재하는 개인들의 합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제도와 물질이 얽힌 네트워크에 가깝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보이는 하루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다수의 수고에 의해 떠받쳐진다.


그리고 그 모든 배후에, 

어쩌면 섭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더 큰 시선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각도에서 전체를 바라보며, 

부분적인 선의와 작은 보호와 설명되지 않는 만남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가는 어떤 시선 말이다.


새끼 고양이는 닭고기를 보았고, 

나는 어미를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둘을 모두, 

또 그 둘이 미처 보지 못한 것까지 보고 계셨을지 모른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세계는 더 이상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분석하고 소비하고 통제할 대상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읽고 경외해야 할 신비가 된다.


 



맺음말: 새벽이 남긴 문장


오늘 새벽의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 

나무 사이를 오가던 새끼들의 가벼운 몸짓,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경계를 서던 어미의 눈빛.


어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어떤 감사도,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새끼들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몫을 잠시 뒤로 미루고 누군가의 안전을 먼저 살피는 능력. 


말보다 자리로, 주장보다 침묵으로, 

소유보다 보호로 완성되는 힘.


그 새벽의 고양이들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문학의 한 문장을 읽었고, 

과학의 한 구조를 보았고, 

철학의 한 질문을 들었으며, 

신학의 한 암시를 받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거대한 이야기 속을 지나가는 

작은 새끼 고양이들인지도 모른다. 


눈앞의 먹이에 마음을 빼앗긴 채, 

우리를 위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사랑의 시선을 자주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새벽은 왔다가 간다. 

그리고 그 새벽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것, 

설명되는 것보다 더 넓은 것, 

말해진 것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이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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