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004 안개 너머의 빛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영남대학교 생명공학부 교수님들과 함께 흑산도를 찾았다.
섬은 육지와 달랐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착한 순간부터
세상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
하늘은 더 넓었고,
바다는 더 깊었으며,
바람은 더 솔직했다.
섬 탐방을 마치고 저녁 무렵 전망대에 올랐다.
멀리 섬들이 보이고,
그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바다 위에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안개는 천천히 섬들을 삼켰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희미해졌고,
수평선도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풍경이 하나둘 안개 속으로 숨어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동안 안개가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저녁 햇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빛이었다.
빛은 안개를 뚫고 나와 바다 위에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장면은 몇 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몇 초는 오래 기억될 만큼 강렬했다.
나는 급히 셔터를 눌렀다.
한 장.
또 한 장.
사진을 찍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살아가다 보면 안개 같은 시간이 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으며,
기다림만 길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빛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빛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안개 뒤에 가려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흑산도의 바다는 내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안개는 영원하지 않았고,
빛도 포기하지 않았다.
바람이 길을 열자
빛은 다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풍경이 아니다.
안개를 밀어내며 나타나던 그 순간의 빛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맑은 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안개가 짙은 날에도
언젠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빛을 믿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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