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s 1:12
12 While the king sitteth at his table, my spikenard sendeth forth the smell thereof.
12 My king, while you
were on your couch,
my aroma was a magic charm.
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이 구절의 표현은 아가서를 읽는 많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게 이 주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제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해석이 옳다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것(그리스도와
영적인 친교)에 관한 귀중하고 중요한 진리를
밝히기 위하여 그런 제안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제들을 살펴봅니다-
I. 복음의 예식은 그리스도의 식탁입니다.
(계시록 3:20 참조,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서 그와 함께, 그가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선지자가 말하였듯이, 그러한
친교에서 우리는 "골수로 가득찬 기름진 잔치"를
합니다. "(참조, 주님의 말씀, " 오라, 모든 것이 준비
되었다; 나의 소들 " 등), 이제 그러한 친교가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1.기도 중.
단순히 말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참된 기도로
2. 교회 예배에서.
우리는 실제로 안식일과 성소에서
"우리 시대를 감염시키는 근심걱정들이,
마치 아랍인들처럼, 자신들의 천막을 접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얼마나 자주 발견하고
있습니까!
3. 주님의 식탁은 특히 왕의 식탁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에 "거룩한 친교"라는 이름이
특별하게 붙여졌습니다. 식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주님과 친교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이며,
또 그렇게 하도록 기획되었습니다. 하지만-
II. 그들의 유효성과 가치는 왕의 임재에 의존합니다.
"왕이 앉아있는 동안" 등.
그리스도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합니까! 또 교회가 예배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합니까! “
주님의 몸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의 섬김을
쓸모없는 것보다 더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판단과 비난을 불러옵니다).
주님의 임재를 확실하게 인식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여기, 친교할 수 있는 시절로 나오지 맙시다.
III. 그리고 그 효과로 나타납니다.
"내 가시나무가 보내는 동안 ..." 등.
"성령의 은총이 가장 활발하게 나타날 때는,
바로 주님과 친교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룩한 향기,
"달콤한 냄새"가 주님 종들의 마음에 의해
그렇게 친교하는 시절에 발산됩니다. 그리고:
1. 주님 자신에게.
우리의 기도는 그분 앞에 "분향으로, 저녁제물로
우리의 손을 높이드는 것"입니다. 그는 기뻐합니다.
그는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다나엘은 열렬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를 위한 우리 집회에서 (실질적인 예배에서)
주님은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한
숭배자들에 대해서 "주님이 들었고, 들으시고,
기념책이 그 앞에서 기록되었습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 중
"내가 보석을 만드는 날에, 그들은 나의 보석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친교를
한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회개와 겸손과
자아반성, 주님께 드리는 영적인 모든 요소는
참으로 향기롭고 달콤하고 귀중합니다.
마치 참회하는 막달렌과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의 신성한 몸에 부은 향기름과 같이.
2.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향기를 인지하고
공유합니다.
우리들의 동료인 손님들. 교회에서 참된 축복과
다양한 도움이 샘솟듯 나오는 이유는 주님과
끊임없는 친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향력은 참으로 신성한 영향입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향력은
"향기름을 쏟아 부은 것"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 (그들의 자녀들,
종들, 이웃들, 동료들, 그리고 세상사람들)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3. 그들 자신도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과 친교를 통한 경우처럼 우리 안에있는
순결하고, 거룩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모든 것을
살리고, 확인하고, 강화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모세의 얼굴은 그가 주님의 면전에 있었던 후에
빛이 났습니다. 진실한 성도들에게 오는 영적인
도움은 너무나 위대합니다. 또 항상 그렇게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주님과의 친교 기회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종교를 자신들속에 간직만
했다면 아무도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와 친교를 위해 함께 모이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를 위해, 그들은 전 세계에서
끌려와서 "양처럼 학살당하고" "온 종일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주는
실질적인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증거이자 증명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이와 같은 확실한
진리가 우리들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The form of expression in this verse has suggested thoughts on this theme to so many devout students of this book that, whilst not admitting their interpretation as correct, we may nevertheless avail ourselves of such suggestions in order to set forth some precious and important truths concerning it - the soul's communion with Christ. And we note -
I. THE ORDINANCES OF THE GOSPEL ARE CHRIST'S TABLE. (Cf. Revelation 3:20, "If any man will open the door, I will come in to him, and sup with him, and he with me.") In such communion we have the "feast of fat things full of marrow" of which the prophet speaks (cf. also our Lord's words, "Come, for all things are ready; my oxen," etc.), Now, such communion is had:
1. In prayer. Not mere saying prayers, but in true prayer.
2. In the worship of the Church. How often have we found this to be so! On the sabbath, and in the sanctuary, how often we have there found that
"The cares which infest our day
Have folded their tents, like the Arabs,
And as silently steal away!"
3. The table of the Lord is especially the King's table. Hence to our service there the name of "holy communion" has been pre-eminently given. All these are opportunities of such communion, and were designed so to be. But -
II. THEIR VALIDITY AND VALUE DEPEND ON THE KING'S PRESENCE.
III. AND ARE MANIFESTED BY THEIR EFFECTS.
1. To the Lord himself.
2. And many others are conscious of, and share in that fragrance.
3. And they themselves are bl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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